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안에서 참된 평화와 위로를 찾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주님, 저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어 당신의 평화를 맞이하게 하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저희의 슬픔 속에 함께하시어 저희를 일으켜 주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희가 당신의 사랑 안에서 희망을 보게 하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누군가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받아본 적이 있으신지요. 요즘처럼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종이 위에 꾹꾹 눌러 쓴 누군가의 필체를 마주하는 일은 참으로 특별한 경험입니다. 그 글씨체에는 그 사람의 성격, 그날의 기분, 그리고 우리를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글씨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하나의 ‘지문’과도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편지를 마무리하며 아주 특별한 언급을 합니다. “이 인사는 나 바오로가 직접 내 손으로 씁니다. 이것이 내 모든 편지에 들어가는 표지입니다. 나는 이렇게 씁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독특한 필체가 곧 자신의 진심과 권위를 보증하는 표지라고 말합니다. 그는 말로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밤낮으로 수고하며 직접 손으로 일했고, 그 손으로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며 편지를 썼습니다. 그의 겉모습과 속마음은 일치해 있었고, 그 일치된 진실함이 그의 ‘필체’에 담겨 있었습니다.
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해 무서운 질책을 쏟아내십니다. “너희는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그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그 안에는 진실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필체’가 없었고, 오직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화려한 ‘장식’만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저는 이 ‘필체’와 ‘회칠한 무덤’이라는 이미지를 묵상하며, 우리 곁을 떠나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지 이제 두 달이 된 벤자민 보(Benjamin Vo)를 기억해 봅니다.
지난 6월 13일, 벤이 세상을 떠난 후 아빠 알란 님과 엄마 타오 님, 그리고 동생 라이언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왔을까요. 두 달이라는 시간은 슬픔이 무뎌지기에는 너무나 짧고, 오히려 그 빈자리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매일같이 확인하게 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가슴을 짓누르고, 식탁에 놓인 빈 의자가 마치 거대한 절벽처럼 느껴지는 날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벤이 우리에게 남겨준 ‘필체’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됩니다. 벤자민은 겉만 화려하게 꾸민 ‘회칠한 무덤’ 같은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벤의 삶은 비록 15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안쪽까지 맑고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찬, 하느님께서 직접 쓰신 아름다운 편지였습니다.
벤자민 보, 우리 벤은 참으로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의 지성은 날카로웠지만, 그 지성을 움직이는 동력은 언제나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벤이 가졌던 수많은 꿈 중에서 유독 우리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Con Chim Airlines’(새 항공사)라는 이름의 회사를 만들고 싶어 했던 꿈입니다. 비행기를 그토록 좋아했던 벤은 단순히 기계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그 해방감과 기쁨을 사랑했습니다. ‘Con Chim Airlines’라는 이름을 말할 때마다 벤의 얼굴에 번지던 그 해맑은 웃음과 낄낄거리던 웃음소리… 그것은 벤이 세상에 남긴 가장 아름다운 ‘필체’ 중 하나였습니다. 그 웃음에는 어떤 위선도, 어떤 계산도 없었습니다. 오직 순수한 기쁨과 세상을 향한 따뜻한 호기심만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신 이유는 그들의 ‘안쪽’이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벤의 안쪽은 어떠했습니까? 벤이 열다섯 살이었을 때, 뇌졸중으로 고통받던 윌리엄 삼촌의 소식을 듣고 엄마 아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자신이 아끼던 저금통을 통째로 내놓아 삼촌을 돕고 싶다고 했던 그 제안 말입니다. 벤은 실제로 저금통을 깨뜨리거나 돈을 건네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제안’ 자체가 벤의 영혼이 어떤 색깔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길거리에서 자선을 베풀었지만, 벤은 아무도 보지 않는 집 안에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어놓으려는 사랑의 필체를 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알란 님과 타오 님.
때때로 어둠 속에서 “왜?”라는 질문이 여러분을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내가 그때 더 주의 깊게 살폈더라면 우리 벤이 지금 곁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소리 없는 자책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생 소경을 보시고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벤의 아픔과 이별은 결코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주셨고, 벤은 그 사랑 속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소년으로 살았습니다. 벤은 아빠를 자신의 ‘복사판’이라고 생각할 만큼 존경했고, 엄마의 따뜻한 품 안에서 안식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이 벤에게 준 사랑은 벤의 영혼에 깊이 새겨져, 이제 하늘 나라에서 빛나는 훈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무거운 죄책감의 돌덩이를 내려놓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사랑을 기억하시며, 여러분의 눈물을 당신의 병에 모으고 계십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친히,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에게 평화를 내리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이 평화는 슬픔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 한가운데에서도, 벤이 이제는 고통 없는 하늘 나라에서 성 칼로 아쿠티스와 함께 마음껏 비행기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벤은 이제 ‘Con Chim Airlines’의 진정한 기장이 되어, 여러분의 삶을 하늘 위에서 수호천사처럼 지켜보고 있습니다. 벤이 아빠의 꿈에 나타나 “바빠서 말을 못 했을 뿐이지, 저는 괜찮아요. 이제 천국에서 영원히 살 거예요”라고 말하며 미소 지었던 것처럼, 벤은 이미 하느님의 평화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동생 라이언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라이언, 형은 너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든든한 버팀목이었지. 형이 남겨준 그 맑은 웃음과 따뜻한 마음은 이제 네 안에서 계속 살아갈 거란다. 네가 형의 몫까지 씩씩하게 자라고, 엄마 아빠를 위로해 드리는 든든한 아들이 되는 것, 그것이 형이 하늘에서 가장 바라는 일일 거야. 네가 힘들 때마다 형과 함께 덮었던 그 초록색 잎사귀 담요를 떠올려 보렴. 형은 언제나 너의 곁에서 너를 안아주고 있단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고 멀리서 이 기도를 함께하고 계신 모든 분.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필체’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겉만 번지르르한 회칠한 무덤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벤자민처럼, 비록 작고 소박하더라도 진실한 사랑의 마음을 안쪽에 채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성당 문을 나서며 우리가 가슴에 품고 갈 한 가지 작은 실천을 제안합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짧은 글이라도 직접 손으로 써서 마음을 전해 보십시오. “사랑한다”, “고맙다”,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라는 그 한마디를 여러분의 필체로 남겨 보십시오. 그 작은 정성이 바로 오늘 복음이 말하는 ‘안쪽을 깨끗이 하는 일’이며, 바오로 사도가 빌었던 ‘주님의 평화’를 이 세상에 전하는 길입니다.
벤자민 보, 사랑하는 벤.
네가 ‘Con Chim Airlines’를 꿈꾸며 짓던 그 눈부신 미소를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너의 그 순수한 영혼의 필체는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기록으로 남을 거야. 이제는 하느님의 날개를 달고 저 높은 하늘에서 가장 자유롭게 날아오르렴. 우리가 다시 만날 그날, 네가 우리를 위해 예약해둔 천상의 비행기에서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까지, 우리를 위해 기도해다오.
평화의 주님께서 벤자민과 그의 가족,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평화를 내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For the intentions entrusted to Ben on our prayer wall:
At the Savior’s command and formed by divine teaching, we dare to say: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주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모든 악에서 보호하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아멘.